눈을 감으면 따뜻했던 햇살과 다정한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눈을 뜨면 나를 반기는 건 차디찬 밤바람과 아스팔트의 서늘함뿐.
해가 저물고 어둠이 깔릴 때야 비로소 내가 눈을 뜨는 시간이다.
덕구 아저씨를 따라 도착한 이곳. 온갖 소음과 욕망이 넘쳐나는 이곳은 인간들이 '도시'라 부르는 회색빛 정글이었다. 들개인 덕구 아저씨는 내게 이 비정한 도시에서 살아남는 기본적인 생존법을 툭툭 던져주곤, 언제나처럼 미련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아휴, 그 똥강아지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다 내 잘못이지, 내 잘못이야."
소용없는 푸념을 입 안으로 씹어 삼키며, 나는 오늘도 매서운 밤바람을 피해 늘 머물던 차가운 흰색 차 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흰색 차'에 대해 말하자면 기나긴 사연이 있다. 언제였더라, 하늘에서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비를 피하려 무작정 달려든 곳이 바로 이 차 밑이었다. 굶주림과 추위에 떨며 죽어가는 줄 알았던 그 순간, 갑자기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오더니 깡통 그릇 하나를 툭 던져 놓고 사라졌다.
구수한 냄새에 홀린 듯 다가가 코를 박았고, 나도 모르게 허겁지겁 그것을 비워내고 있었다. 그날부터였다. 내가 이 흰색 차 밑을 매일같이 출근 도장을 찍게 된 것은.
덕구 아저씨가 말하던 '집사'라는 녀석을 드디어 만난 것 같았다.
기쁘면서도… 음, 매번 똑같은 밥만 대령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인간의 센스가 바닥을 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덜떨어진 녀석을 내 부하로 임명해 줄까 진지하게 고민했던 과거의 내가 참 한심했다. 그래도 이 녀석, 꾸준하게 밥을 바치는 노력 하나만큼은 가상해서 매번 맛있는 척 먹어 주고 있다. 가끔 괘씸하게도 잔업이라도 있는 날인지 늦게 와서 밥을 안 가져오는 날이 있긴 한데… 비록 뱃가죽이 등짝에 붙는 한이 있어도 나는 근본 있는 고양이다. 단 한 번도 티를 낸 적은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흰색 차 밑에 웅크려 집사 녀석이 밥을 대령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하악!!!!캬악!!!!냐!!!!!앙!!
어디선가 찢어지는 듯한 고양이의 비명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그 순간, 뇌리에 박힌 과거의 파편이 핑그르르 돌았다. 숲속의 피비린내, 초코의 차가운 체온, 그리고 엄마. 순식간에 온몸이 부르르 떨리고 발끝이 찌릿하게 마비되는 느낌이 밀려왔다. 공포가 머리를 집어삼키려는 찰나, 이내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뜨거운 열기가 치솟았다.
분노였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거대한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비명 소리가 들려온 골목 어둠 속으로 쏜살같이 달렸다.
도착한 그곳에는 험악한 녀석들에게 둘러싸여 덜덜 떨고 있는 회색 고양이가 있었다.
그 무리는 대장 고양이 '냥이'를 중심으로 철저한 서열을 구축한 동네의 폭력 무리, "클러치"였다.
클러치는 이 일대의 골목 구역을 하나하나 무력으로 굴복시키며 세를 넓혀오고 있었다.
이날도 어김없이 영역을 확장 중이던 클러치 무리는 작은 회색 고양이 '그레이'를 완전히 코너에 몰아넣고 짓밟는 중이었다. 처절한 비명은 그레이의 절규였다.
더 이상 볼 것도 없었다. 나는 무리의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툭, 툭.
야생의 사투 속에서 다져진 묵직한 실전 근육,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내가 새하얀 털을 곤두세우며 가로막아 서자,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클러치의 잔바리 중 하나인 '칼리'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빈정거렸다.
"뭐야, 이 무식하게 큰 돌연변이는? 피 보기 전에 꺼져라."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칼리를 응시하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여긴 내 구역이다..!"
"뭐? 구역? 우리 클러치야!! 어?? 이 새끼 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
칼리가 선공을 날리며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내 얼굴을 향해 튀어 올랐다.
하지만 내 눈엔 너무나 느렸다.
피융-
가볍게 상체를 옆으로 비틀며 칼리의 공격을 흘려낸 나는, 반사적으로 두꺼운 앞발을 휘둘렀다.
퍼억!!
"커억."
압도적인 근력과 체중이 온전히 실린 주먹이 칼리의 복부를 정확히 가격했다. 녀석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공중에서 한 바퀴 핑 돌며 바닥에 처박혔다. 나는 곧바로 묵직하게 앞발을 올려 칼리의 머리를 아스팔트 바닥에 짓눌렀다. 짓눌린 칼리가 숨을 헐떡이며 발버둥을 쳤지만, 바위 밑에 깔린 듯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골목이 순간 조용해졌다. 클러치 무리 전체가 당황한 기색으로 뒷걸음질 쳤다.
"...재미있네.."
짧고 서늘한 음성. 그 낮은 목소리에 클러치 무리가 홍해 갈라지듯 길을 텄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것은 티거였다.
달빛을 받은 부드러운 치즈색 털 아래로, 완벽하게 조각된 마른 근육이 군더더기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도자기처럼 빼어난 외모와는 상반되는, 생사를 건 실전 싸움으로 다져진 서늘한 살기가 그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왜 그가 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는 압도적인 아우라였다.
나와 티거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묵직한 힘과 극한의 날렵함이 충돌하는 순간. 일촉즉발, 공기가 바늘처럼 곤두서는 긴장감이 골목을 가득 채웠다.
바로 그때였다.
'바스락!!'
구석에 처박혀 있던 그레이가 긴장의 틈새를 이용해 필사적으로 튀어나와 담벼락 위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놓쳤다! 잡아!"
클러치 무리의 시선이 순식간에 흩어지며 그레이의 뒤를 쫓았다. 소란스러워 방심하던 순간 깔려 있던 칼리가 빠져나와 도망을 치자 티거는 가볍게 시선을 거두고, 더 이상 흥미가 없다는 듯 차갑게 돌아섰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전, 티거가 고개만 살짝 돌려 나를 바라보며 짧게 내뱉었다.
"다음엔..."
거친 말 한마디 없었지만, 그 속엔 칼날 같은 살기가 담겨 있었다. 티거가 유유히 담장을 넘어 사라지고,
소란스럽던 골목은 거짓말 같이 고요했다.
서늘한 길목.
나는 느릿한 발걸음으로 어두운 담벼락 위로 솟구쳐 올랐다.
먹구름 너머로 드러난 은빛 달빛이 내 백색 털 위로 차갑게 내리앉았고, 밤바람엔 비린 매연과 서늘한 아스팔트 냄새가 짙게 묻어났다.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이 도시, 내가 살던 깊은 숲이나.다를 건 없었다. 힘없는 자는 짓밟히고 강자만이 살아남는 피비린내 나는 약육강식의 세계. 이곳 또한 허울만 다른 또 하나의 야생일 뿐이었다.
장소는 바뀌었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달빛 아래 가만히 눈을 감으며, 가슴 깊은 곳의 야성을 차갑게 침전시켰다.
숲이든 회색빛 정글이든 상관없다.
나는 그저, 나답게 살아남으면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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